문화/라이프

편견 뚫고 무대 위로! '원조 헌트릭스' 무당들, 국립국악원서 '힙'한 변신 예고!

2025-09-24 17:41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걸그룹 ‘헌트릭스’는 무대 위에서 용기와 희망을 노래하며 어둠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존재다. 세대가 거듭될 때마다 새로운 헌터가 선정되어 이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그들의 먼 선대에는 바로 한국의 전통 무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상의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특별한 무대가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펼쳐진다. 오는 25일부터 26일까지 이틀간, ‘원조 헌트릭스’라 불릴 만한 두 명의 무당, 즉 국가무형유산 보유자인 김동언(70·부산 기장 오구굿 보유자)과 정영만(69·남해안별신굿 보유자)이 현대 국악 작곡가들의 손에서 재탄생한 가락과 국립국악원 창작악단(관현악)의 웅장한 연주에 맞춰 ‘한 판 굿’을 선보인다. 전통과 현대, 영성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이 파격적인 협연은 단순한 공연을 넘어, 한국 전통 문화의 깊이와 현대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들에게 굿은 단순한 생업을 넘어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영만 보유자는 무려 11대째 가업을 이어온 세습무다. 신병을 앓아 신을 받는 강신무와 달리, 세습무는 조상 대대로 신분을 이어받아 무업을 수행하는 독특한 전통을 지닌다. 김동언 보유자 역시 초대 동해안별신굿 전승자인 고(故) 김석출 선생의 셋째 딸로, 어린 시절부터 굿과 함께 성장해왔다. 두 보유자는 오랜 세월 동안 굿이 겪었던 사회적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굳건히 전통을 지켜왔다. 이제야 사람들이 굿이라는 전통문화와 예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봐 주는 것 같다며, 지난 세월의 고난을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동언 보유자는 아홉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년 후 아버지의 심청굿을 보며 처음으로 굿의 깊은 울림을 경험했다고 회상했다. 심 봉사가 아내를 잃고 슬퍼하는 대목에서 아버지가 목이 메어 더 이상 사설을 읊지 못하자, 구경꾼 틈에 숨어있던 가족들을 안으로 들여보냈고, 어린 김동언은 몰래 아버지의 굿을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정영만 보유자는 굿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언제부터 굿을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마을 산등성이에서 들려오던 징 소리와 피리 소리가 가슴에 사무쳤던 느낌은 또렷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굿은 그들의 유년 시절부터 삶의 모든 순간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굿을 이어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정영만 보유자는 20대 시절, 굿을 하지 않기 위해 배를 타고 택시 운전을 하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당시 무당 집안이라는 이유로 심한 핍박과 편견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바로 윗대 보유자인 왕고모의 부름으로 서른이 되기 전 다시 굿판으로 돌아왔다. 김동언 보유자 역시 고생이 많았다. 예전에는 차도 없어 동생들을 업고 5리, 10리 길을 걸어 굿을 하러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굿이 즐거웠다고 말한다. 남들이 ‘무당 딸’이라고 손가락질해도 싫거나 부끄럽지 않았던 것은, 언젠가 큰 무녀가 되겠다는 확고한 목표와 작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굿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속 헌트릭스가 세상을 구하는 기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굿의 사설은 대부분 고인의 편안한 길을 돕거나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당이 10여 명의 악사들과 함께 굿판을 벌이면, 빙 둘러앉은 구경꾼들은 무당이 읊조리는 가락에 맞춰 함께 웃고 울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삶의 고통을 치유했다. 정영만 보유자는 굿을 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사랑했던 엄마가 고인이 되었다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자녀에게 엄마는 종교가 된다. 때때로 ‘엄마, 하늘에 잘 있지? 나 좀 도와줘’라고 말할 것이다. 이에 화답하는 엄마는 ‘내가 없더라도 희망을 갖고 잘 살아’라고 말할 것이다. 이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이 바로 무당”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대충할 수 없으며, 정말 넋이 오는 듯 애절하고 간절하게 노래한다고 덧붙였다. 김동언 보유자 역시 실제 굿을 하면 관객들의 호응에 따라 앵콜 격으로 타령 같은 것을 더 부르기도 한다며, 이는 극락으로 보내는 망자들을 섭섭지 않게 보내는 차원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요즘은 굿을 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고 정영만 보유자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예전에는 경남 통영 지역에 ‘산수계’라는, 고인이 된 지역 예인들을 기리는 굿 축제가 있었다. 고을의 무당들이 모두 모여 2박 3일 동안 굿을 하고, 일반인들도 구경하러 와 주변 식당들까지 성황을 이루던 큰 행사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경찰들이 ‘풍기문란’을 이유로 단속을 나오면서 굿 문화가 크게 위축되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한때 무당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손가락질과 편견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이번 국립국악원 창작악단과의 협연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국악원이 2021년부터 시작한 ‘전통의 재발견’ 시리즈의 여섯 번째 공연으로, 김동언, 정영만 보유자뿐만 아니라 유지숙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이태백 진도씻김굿 이수자 등 지역별 대표 명인들이 함께 무대에 선다.

 

음악적으로도 이번 협연은 상당한 도전이다. 굿은 창을 담당하는 ‘대사산이’가 주도하며, 정해진 악보나 장단이 따로 없다. 함께하는 산이(악사)와 승방(무녀) 역시 대사산이의 노래 흐름에 맞춰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상 대부분 애드리브로 이루어지던 굿이 관현악단과의 협연을 통해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연주 전 약속하고 조율해야 할 부분이 훨씬 많아졌다. 보유자들은 이번 무대를 위해 관현악단과 3번 이상의 리허설을 거치며 섬세한 호흡을 맞춰나가고 있다.

 

협연을 준비하는 소회에 대해 정영만 보유자는 “국악계 후배들과 이 장중한 음악을 함께 엮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굿판 같다”며, “우리 음악은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다. 이런 오묘한 기법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따라오지 못한다. 드디어 이런 굿의 진가를 알아준 것 같아 뿌듯하다”고 벅찬 감회를 드러냈다. 김동언 보유자 역시 “빨리 관객이 보고 싶다. 관객이 있으면 또 내 입에서 나오는 사설이 달라질 것이다”라며 관객과의 교감을 기대했다. 그녀는 예전에 덴마크에서 굿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돌아가신 분들의 한을 풀어주는 문화가 그들에게는 생소했는지 관객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전하며,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뜨거운 호응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헌트릭스’의 이야기가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한국 전통 무당들의 깊은 예술혼과 만나 어떤 감동과 전율을 선사할지 귀추가 주목된다.